<오피스>(2005)

 저는 필터 커피를 좋아하는데요. 필터 커피는 추출 시간이 길거나 물 온도가 너무 높을 때, 후미에 씁쓸함이 남습니다. 향과 맛이 아무리 훌륭해도, 후에 느껴지는 텁텁함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들죠. 부끄러움은 후미의 텁텁함과 비슷합니다. 상황과 맥락은 둘째치고, 부끄러움이 모든 감정과 상황을 뒤덮어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요. 부끄러움이란 이상향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핍의 정서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동반하기 때문이죠.

 또한 부끄러움은 분노나 슬픔만큼 감정의 골이 깊지는 않지만, 가느다란 실처럼 길게 여운이 남습니다. 생명력이 긴 감정이죠. 그렇기에 전 여자 친구와의 이별의 순간이나 직장 첫날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던 순간처럼 수년 전의 부끄러운 일도 느닷없이 떠올라요.

 억지로 시금치를 먹어야만 하는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운 순간을 곱씹어야 할 때면, 저는 눈을 1~2초간 질끈 감습니다. 기억의 세포를 쥐어짜 소멸시키듯이 말이죠. 한 지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내며 기억을 날려 보낸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건 일시적인 해소죠. 다음날이면 또다시 같은 감정에 이불을 찰 게 뻔합니다.

부정하는 것이 무언가를 지우고 어디선가 빠져 나오는 일이라면, 긍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직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_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中

 어떤 식으로든 그 부끄러운 일을 직시해야 합니다. 입안의 쓴맛이 두려워, 자꾸만 녹아 없어지는 사탕을 입에 넣어선 해결되지 않죠. 쓴맛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내야만 비로소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이 꼭 진지하고 무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부끄러운 일을 유머의 소재로 사용합니다. 약점을 드러내 남을 웃기는 것이죠. ‘나 그때 정말 바보 같았잖아’라고 말하면서 웃음과 함께 부끄러움을 목구멍으로 넘겨내는 것. ‘웃어넘긴다’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방법입니다. 슬픔은 나누면 2배가 된다고 믿지만, 부끄러움은 나누면 반이 되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상황과 감정을 마주하고 잊어내는 건 덤이죠.

 여러분의 새벽을 괴롭히는, 언젠가 이불에 구멍을 뚫어버릴 것 같은 부끄러운 기억이 있나요? 오늘 그 부끄러운 감정을 유머라는 설탕과 함께 삼켜보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