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타인으로부터 받은 분노와 상처를 어떻게 소화하나요?

– 에디터 프리구티

소설 『언어의 무게』가 건네는 질문

 막힘없이 통쾌한 빠른 전개를 가리키는 ‘사이다 전개’. 이는 가속이 만연한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갑질을 일삼는 상사에게 굴욕과 함께 해고를 선사하거나, 어릴 적 괴롭힘을 주도한 동급생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죠. ‘용서’보단 ‘복수’라는 이름 아래, 주인공은 세상의 불협화음을 정리해 나갑니다. 현실에는 지지부진한 ‘고구마’가 가득하기에, 그들의 청량감 넘치는 복수가 더욱 시원하게 느껴지죠.

 우리네 현실에서는 복수를 대신 해줄 전지전능한 대리인도, 모든 것을 다 걸고 복수에 뛰어들 용기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허구의 창작물과는 달리, 우리는 ‘복수’보단 ‘용서’를 권하죠. 그러나 내 삶을 무너뜨릴 정도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타인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요?

 ©비채

 오늘 제가 소개할 작품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언어의 무게』입니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잘 알려진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사실 ‘페터 비에리’라는 철학자의 필명인데요. 평소 그가 존경하던 프랑스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과 스위스 출신 작가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어’에서 따온 이름이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은 내가 철학으로는 말할 수 없던 것들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며 두 학문의 역할을 철저히 분리했어요. 『언어의 무게』에서는 철학자와 소설가, 두 인생을 살아가는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내, 주인공이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탈바꿈하는 여정을 그려내죠.

 “당신 때문에 내 삶에 막대한 재난이 벌어졌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성과 상상력을 당신이 갖추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레이랜드는 지중해에 맞닿아 있는 모든 국가의 언어를 섭렵하겠다는 꿈을 지닌 번역가입니다. 어느 날 레이랜드는 견딜 수 없는 편두통과 함께 발작을 마주했어요. 손쓸 겨를도 없이 땅에 얼굴을 맞댄 그는 자신이 지금껏 체화한 언어를 되뇌었어요. 자신의 언어를 잊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죠. 이후 그에게 발작이 찾아올 때면, 근처의 인물에게 사전을 읽어달라고 요청하거나, 그리스어로 송출되는 뉴스 채널을 틀어 달라고 부탁하죠. 이 발작을 계기로 레이랜드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됩니다. 레이랜드는 뇌종양을 ‘선고’ 받았어요. 그는 사별한 아내에게 이어받은 출판사를 판매하고,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던 트리에스테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삼촌에게 증여받은 별장에서 그와 함께했던 언어 공부를 추억하며 지금껏 체득한 단어들을 더듬기 위해서였죠.

 언제 죽을지 안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이 있죠. 그는 죽음을 통고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죽음을 통고받으면 외로워지지. 삶이 ‘끝’이라는 느낌에 담긴 외로움은 누구도 덜어주지 못해.” 그는 매일, 가끔은 시간마다 찾아오던 다음 발작에 대한 불안과 함께 마지막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친구, 현재를 함께 즐기는 이웃, 미래를 희망하는 아들과 딸이 있었죠. 그는 차츰 죽음을 받아들이고 여생을 충실히 살아가려 했어요.

©Die 12 Geschworenen

 덤덤히 죽음을 기다리던 레이랜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바로 뇌종양 판정을 받은 엑스레이 사진이 레이랜드의 사진이 아닌 다른 환자의 사진이었던 것. 그는 무려 77일간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았는데 말이죠. 레이랜드의 첫 번째 반응은 죽음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안도였어요. 그다음 물밑듯이 밀려오는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게으른 하루하루를 보냈다며 시간을 잃은 분노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엑스레이 사진을 검토해 보지 않은 의사의 실수, 직무태만에 분노했죠.

 레이랜드는 우연히 기차 플랫폼에서 자신에게 가짜 죽음을 선고한 의사를 마주쳤어요. 그는 의사에게 자신의 삶에 막대한 재난을 주었다며, 이 모든 게 당신이 기본적인 확인 의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질책했죠. 이후 그는 자신의 분노를 후회했지만, 끝내 그 의사를 용서하진 않았어요. 의사를 자신의 실수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하얀 카스트’라고 꼬집으며 말이죠. 용서를 건네고 사건을 망각한 채 새로운 삶을 살아낼 거라고 생각했던 제 예상과 달리, 레이랜드는 의사를 용서하지도, 또 망각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어요.

“번역이란 다른 언어로 똑같은 일을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어 ‘부러움’을 ‘질투’와 ‘연민’을 동정과 혼동하지 않아야 하죠.”

 그 대신 그는 잘못을 저지른 의사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충실했습니다. 번역가 레이랜드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그녀에게 꾸준히 편지를 작성했어요. 아내는 그 편지를 읽지 못하지만 말이죠.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가 곧 자신에게 쓰는 행위와 같다고 표현해요.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명확한 형태로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죠. 독자가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을까요? 그는 편지를 쓸 때면 두려움 없이 솔직해지려 했고 상황과 타인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방되었죠. 죽음을 선고받았을 때도, 자신을 잃어갈 때도,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를 느꼈을 때도, 그는 편지로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번역해냈어요. 마치 그가 소설을 번역하듯,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냈죠. 그는 끝내 감정과 상황을 받아들이고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되찾습니다.

 용서는 삶의 미덕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타인을 벌하지 말고, 사랑하는 것. 사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죠. 복수는 집착이고 용서는 망각이라고 하지만, 이내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용서만큼 완벽한 복수는 없다는 말은 오히려 두 행위의 공통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두 행위 모두 여전히 타인을 향해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용서와 복수는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가 아닌 ‘우리’의 감정과 상황을 고려합니다. 가끔은 그 사실이 억울하기도 하죠. 이처럼 용서와 복수는 분명 다르지만, ‘나’보다 ‘우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에 내 감정을 돌보는 데에는 소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중심에 둔 감정 소모에 갇혀, 정작 ‘나’를 중심에 둔 감정의 정리와 해석에는 서툰 채 살아갑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술렁일 때, 우리는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보다 직관적인 타인의 잘못이나 상황의 뒤틀림에 매몰되곤 하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변화의 대상을 언제나 외부로 산정하곤 해요. 물론 이 또한 필요한 과정이지만, 그 이전에 내 감정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 감정을 나 자신에게로 수렴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랜드가 오진과 함께 겪은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감정들을,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번역해낸 것처럼요.

 『언어의 무게』의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글쓰기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성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또는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마주한다고 해서 그 미운 감정이 사라지거나,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감정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이나 외부 상황으로부터 떼어내어, 나의 언어로 정리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다시 나에게로 되돌릴 수 있게 되죠.

여러분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분노와 상처를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