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을 덮고, 엔딩 크레딧이 흐른 뒤에도 마음 한켠에 오래 머무는 작품이 있습니다.
격주 수요일, 퀘스천퍼데이는 그 여운의 틈에 스며든 질문 하나를 꺼내어 소개합니다.

 몇 페이지를 들추다 끝내 읽지 못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최근 몇 주 동안, 장 그르니에, 슬라보예 지젝 등 철학자의 서적을 읽다 보니 눈꺼풀이 저절로 무거워지더군요. 모르는 인물과 사상이 나올 때면 나무위키를 읽는 데 시간을 더 들이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다시 첫 장으로 되돌아가길 여러 번. 책들을 고스란히 책장 깊숙이 쑤셔 넣었습니다. 어려운 문장에 두들겨 맞은 후에, 저는 비문학보다 비교적 읽기 편한 소설을 집어 들었어요. 관성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손이 가곤 하는데, 그들의 개성 넘치는 문체와 구조가 유독 물릴 때가 있죠. 

 그럴 때 세계문학 전집은 제게 최고의 선택이 되어줍니다. 고전 문학은 장르를 막론하고 술술 읽힌다는 점이 큰 장점이죠. 그러면서도 끝에 다다랐을 때는 곱씹어볼 만한 질문을 남긴다는 것도 큰 매력입니다. 다 읽고 나면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책장을 책임지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분명 느끼죠. 오늘은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작가 서머싯 몸의 3대 장편 소설 중 하나인 『면도날』이 건넨 질문을 소개할게요.

 소설 『면도날』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청년 래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계속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 놓습니다. 다소 기행에 가까운 행위인데요. 안정된 직장을 모두 거절하고 파리로 떠나, 도서관에 앉아 하루 종일 철학서를 읽는가 하면. 직장 없이 평생 세계를 떠돌겠다는 이유로 약혼한 여자 친구와 파혼을, 이후에는 독일과 영국, 인도를 오가며 망명자를 자처하기도 해요. 또, 전 약혼녀와 친구 사이인 알코올 중독자 소피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혼 전날 소피가 사라지면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에는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기부하고, 미국에서 트럭 운전사를 꿈꾼다고 밝혀요. 

 이러한 기이한 삶의 행적을 밟은 계기는 바로 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눈앞에서 목도한 친한 동료의 죽음. 래리는 ‘삶이란 무엇일까?’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자신을 던지기로 마음먹습니다. 4년 내내 책 속에 파묻히기도, 탄광과 뱃일 등 고강도의 신체 노동을 통해 성찰하기도, 수도원과 힌두교의 사원에서 종교적 깨달음에 다가서기도 해요. 그는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고, 호기심을 집요하게 잡아둡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남은 여생을 모두 바치죠.

영화 <면도날>

 주인공 래리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태도를 고수하는, 이상적인 성인으로 보이죠. 그렇기에 다른 등장인물보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래리에게 시선이 옮겨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래리의 길에 의문을 품고 의심하는 세속적인 장애물을 빌런으로 여기죠. 저 또한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이룬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한 발짝 외면하고, 보편성 사이에서 항상 예외를 택하는 래리의 다음 이야기를 계속 기다렸어요.

 그러나 작가는 래리의 삶과 다른 등장인물의 삶 사이의 경중을 재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아요.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적 삶을 택한 래리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사랑을 택한 그레이,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고 돈을 택한 이사벨, 볼품없는 삶을 인정하고 뒤늦은 꿈을 이루는 수잔. 오히려 각자의 삶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가치를 향해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성실함을 귀천 없이 조명합니다. 비록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가 세속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난관을 헤쳐나가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죠.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래리의 고통과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가진 돈을 모두 잃은 그레이의 고통. 성인을 만나 삶의 의미에 다가간 래리의 축복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를 만나 화가라는 꿈을 펼칠 수 있었던 수잔의 축복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내 작가는 유별난 래리의 삶은 물론, 등장인물 모두에게 삶에 빛을 내렸고 특별함을 부여했어요. 

 소설 『면도날』은 독특하게도 작가 본인을 등장인물로 등장시켜, 관찰자적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요. 그리고 등장인물이자 작가의 이 문장에 소설의 메시지가 함축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작가가 주목한 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향해, 그것이 무엇이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대하는 등장인물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은 난잡하고 비정하며,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끊임없이 살아내야만 한다고 말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행복’이라고 답합니다. 그리나 행복을 이루기 위한 각자의 철학과 가치관은 천차만별이죠. 그러나 자신이 세운 행복의 방법을 끊임없이 의심한다면 그 방법이 옳든 그르든 결국 행복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현실은 행복에 쉽게 다가서도록 도와주진 않으니까요. 주인공 래리의 방법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현실은 냉혹한 남들의 비난이라는 시련을 줬어요. 주인공 이사벨의 방법은 행복한 가정과 충분한 재산을 이루는 것이었고, 현실은 경제 대공황이라는 역경을 맞았죠.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방법을 꾸준히 관철하며 심지를 지켜냈어요. 

 삶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시련과 불확실성으로 흔들리지만, 『면도날』 속 인물들처럼 자신이 믿는 행복을 성실히 좇고 열정으로 지켜내고 싶은 기준과 길이 여러분에게도 있나요?

어제의 질문은 '해야 할 말을 못한 적이 있나요?' 였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답변들 중에서 퀘스천퍼데이가 공유하고 싶은 다섯 분의 답변을 선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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